2025.06.11 (수)

  • 구름많음동두천 17.6℃
  • 맑음강릉 20.3℃
  • 구름많음서울 18.2℃
  • 맑음대전 18.5℃
  • 맑음대구 19.0℃
  • 맑음울산 20.0℃
  • 맑음광주 18.4℃
  • 맑음부산 19.1℃
  • 맑음고창 18.4℃
  • 맑음제주 21.3℃
  • 구름많음강화 15.3℃
  • 구름조금보은 17.3℃
  • 맑음금산 18.1℃
  • 맑음강진군 18.7℃
  • 구름조금경주시 20.7℃
  • 맑음거제 19.7℃
기상청 제공

긍정적 사고로 사회의 아름다운 융합에 앞장서는 오희주 회장

 

 

사회는 다양성을 요구하고 있다. 그 다양성이 편향되면 사회 구조는 한쪽으로 기울어지게 된다. 이러한 사회는 갈등과 분란을 초래하여 건강한 공동체를 형성할 수 없다. 젊은 나이에 사회의 융합에 앞장서고 있는 한국플라워디자인협회(KFDA) 리치플중앙회 오희주 회장. 그녀는 강한 긍정적인 사고로 험난한 고난의 길을 마다하지 않는다.

 

열악한 환경을 극복하다.

제부도, 궁평항, 전곡항, 화성 송산면 고정리 공룡알화석산지 등 이름만 들어도 익숙한 경기도 화성시가 그녀의 고향이다. 그녀는 극빈한 가정의 자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태어날 때의 아픔도 간직하고 있다. 당시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워 부친은 타지에서 일을 하고 계셨다. 모친이 홀로 있게 되었는데 마침 산통이 와 위험한 상황이었다. 오직 모친이 기댈 수 있는 곳은 모친이 다니는 교회였다. 무거운 몸으로 교회로 가 목사님의 사모 도움으로 가까운 의원에서 안전하게 태어났다. 

그녀의 부모님은 10살 차이를 극복하고 눈물 나는 결혼식을 올렸다. 부친은 33세의 노총각이었지만 장애가 있었다. 모친은 시골에서 어렵게 자란 23세 아가씨였다. 부친은 유아기 때 목 쪽을 다쳐 결핵을 앓아 초등학교를 마칠 수가 없었다. 부친과 모친 모두 크리스천으로서 그 어려움을 신앙심으로 이겨냈다. 

서로 인성이 좋고 신앙심이 깊어 동네 목사님의 중매로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릴 수 있었다. 하나님의 은총으로 그녀가 태어났지만, 부모님이 맞벌이하셔 그녀를 키울 수 있는 여건이 되지 못했다. 결국 같이 생활하고 계신 할머니의 보살핌을 받으며 곱게 상장했다. 

그녀의 부친은 가구를 만드는 목수로 일하다 건설 사업의 붐이 일어나자, 수입이 더 안정적인 건설 현장으로 이직했다. 집안의 형편이 조금씩 나아져 그녀가 10살이 되던 해에 경기도 화성 발안에 최초로 엘리베이터가 있는 아파트로 이사하여 또래들의 집처럼 포근한 주거에서 생활하기 시작했다. 

할머니 손에서 자랄 때는 친구를 초대할 수 없었다. 어려서 부모님의 돌봄이 부족해서 초등학교 2학년까지 조금 지저분하여 아이들로부터 따돌림을 받는 아이였다. 그러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새로운 친구를 만나고, 집도 아파트로 이사를 하면서 성격도 밝아지고 친구들과도 잘 어울리게 되었다.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는 반에서 회장을 맡아 친구들과 선생님들로부터 인정도 받고 칭찬도 받는 통솔력 있는 아이로 성장하여 또래 중심에는 늘 그녀가 있었다.

중학교 진학하여 고등학교 졸업 때까지는 반장, 부반장을 한 번도 놓친 적이 없는 융합의 본보기였다. 진학이나 미래에 대한 설계도 오직 그녀의 몫이었다. 그녀의 부모님은 무한한 신뢰를 그녀에게 주었다. 그로 인해 그녀에 대한 선생님과의 상담도 없는 정신적 우위의 학생으로 인정받기도 했다.

대학교 진학을 앞두고 그녀는 많은 고민에 빠졌다. 자신의 미래와 부모님을 도와야 하는 길목에서 효심이 깊은 그녀는 부친이 하는 사업을 돕기 위해 단국대학교 관상원예학과로 진학했다. 부친이 현장 목수로 근무하면서 경험을 바탕으로 작은 건축사업을 시작했다. 건축사업은 건물만 짓는 것이 아니라 조경도 매우 중요했다. 그녀는 장애가 있는 부친을 옆에서 극진히 보살피면서 함께 해 드리고 싶었다.

대학에 진학해서 1학년 1학기를 제외하고는 학기마다 일부 장학금을 받았고, 대학원 진학해서는 원우회장을 맡아 졸업식에서 학생 대표로 학위를 받았다.

 

여성 사업가로 성공하다.

그녀는 원예 전문가가 되기를 간절히 바랐다. 대학교를 졸업하면서 영국으로 유학(꽃, 원예 분야) 가려고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부친을 도왔던 경리의 급여를 주기도 힘들 정도로 사무실이 운영에 어려움이 있어 부친이 그녀에게 ‘사무실에 경리 언니도 없으니 잠시 도와달라’는 요청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유학을 다녀와서 부친을 적극적으로 돕기로 마음먹었기 때문에 유학을 포기하고 부친이 운영하는 오성종합건설(주)에서 경리업무와 건설회사 경영 전반 및 조경 등 종합적인 업무를 담당했다. 

그녀의 작은 꿈이 실현되었다. 그녀의 유소년기에 자신을 극진히 보살펴 주신 할머니. 장애가 있는 부친, 시어머니를 잘 모시는 모친 등 함께 생활하면서 그동안의 가난과 놀림으로 상처를 받았던 것들이 치유되는 느낌이었다. 

인생은 호사다마라 했던가! 행복했던 그녀의 가정에 슬픔이 왔다. 집안의 기둥이었던 할머니가 치매로 고생하시다 그녀가 25살이 되던 해에 돌아가셨다. 다행히도 할머니를 극진히 보살피고 사랑하여 집에서 편안히 임종을 맞으셨고, 감사하게도 할머니의 임종 자리를 지킬 수 있었다.

그녀가 서른이 되던 2012년 부친은 가슴이 답답하다며 고통을 호소하셨다. 급히 병원에 가보니 의사가 태어날 때부터 심장 판막 기형으로 수술해야 한다고 권유하였다. 누구나 있는 질환이고 수술 성공률이 97%가 넘는다고 하였다. 그래서 1월에 신촌세브란스에 부친을 모셨고 수술하였지만, 중환자실을 나오지 못하시고 2달 반 만에 돌아가셨다.

부친은 형제간의 우애를 중요시하고 형제에게 경제적인 지원 및 조카들의 학비, 용돈, 결혼비용 등 여러모로 도움을 주셨고 지역에서도 삶이 어려운 사람들에게 경제적으로 많은 나눔을 하신 이타적인 분이셨다.

그녀가 초등학교 시절에는 벽제(고양시)에 있는 ‘희망맹아원’이라는 곳에 매월 정기적으로 온 가족이 봉사를 다니기도 했다. 또한 돌아가실 당시에는 교회의 장로로서 한 채뿐이었던 집을 팔아 교회에 건축헌금으로 내셨고, 그녀의 가족은 전세 아파트에 살게 되었다.

부친의 헌신과 사랑으로 많은 사람들을 보살피셨기에 부친은 많은 사람들의 위로와 안타까움 속에 4일장을 교회장으로 치르고 경기도 화성 장짐리에 있는 선산에 영면하게 됐다.

안정적인 회사가 부친의 갑작스러운 유고로 어려움이 일어났고 그녀의 삶도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녀의 피붙이는 언니뿐이다. 그 당시 언니는 첫째 아이는 3살, 뱃속에는 둘째를 임신하여 만삭 중에 있었다. 그녀는 돌아가신 부친을 대신하여 회사를 책임져야 했고, 언니와 모친의 삶도 챙겨야 했다.

회사는 독촉과 재판과 빚에 시달렸고 그녀는 모든 일을 책임져야 하는 상황이었다. 크고 작은 재판을 변호사 없이 그녀 스스로 법무사가 되어 준비서면을 내고 법원에서 재판받아야 했다. 때로는 변호사의 도움으로 받지 못한 공사대금을 받기 위해 처절한 싸움을 하기도 했다.

그녀의 노력으로 회사가 차츰 안정기로 만들어 졌으나, 삼 십대의 미혼 여성이 운영하는 건설회사는 공사 수주에 어려움을 겪었기에 CEO를 새로 영입하기로 결정하고 전문 경영인을 위촉, 각자 대표로서 회사를 운영하였다. 피눈물 나는 그녀의 헌신으로 빚을 청산하고 모친에게 아파트를 사드리는 효성과 언니네 가정과 교회도 잘 돌보는 처녀 가장이 되었다.

회사는 안정적으로 성장하면서 나라장터 입찰을 통해 현재 군포시에 있는 ‘군포시 보훈회관’을 낙찰받아 완공하는 등의 성과를 이뤄 지방에서는 중견 건설회사로 성장했다.

여자의 몸으로 회사와 가정을 책임져야 했던 그녀는 마음이 매우 아파했다. 생활 공간이 집, 교회, 회사였던 그녀는 부친의 타계로 죽음에 대한 불인정, 아빠를 잃었다는 슬픔을 감당하기 어려워 점점 극한 우울증에 빠지게 되었고 삶의 낙을 잃어버려만 갔다. 그러던 중 ‘삶이라는 건 태양이 뜨고 지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일이며, 막을 수 없다. 삶도 마찬가지다. ’라는 얘기를 듣고, 교회에서도 해결되지 못했던 부친의 죽음에 대해 인정하게 되었으며, 메말라가던 마음이 조금씩 생기있게 변해갔다.

 

사회 융합의 롤모델이 되다.

어느덧 결혼하지 못한 그녀는 나이가 40살이 되었다. 남자나 여자나 결혼하지 못한 40대에 들어서면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안정적인 경제적 삶으로 사는 것이 편안한 삶인가에 대한 고민을 하다 끝내 해답을 얻고 새로운 삶을 위해 회사를 그만두게 됐다. 

퇴사 후 혼자 캐나다를 3개월간 여행하며 생각을 정리하고 회복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녀는 모친까지 잃고 싶지 않았다. 모친과 함께 할 수 있는 사업을 구상하다 자신의 전문성을 살릴 수 있는 꽃집을 하기로 결심하고 꽃집을 열었다. 꽃집과 건설회사의 대표로 근무하면서 사회성에 결핍을 느낀 그녀는 꽃집을 모친에게 맡기고 새로운 조직 생활을 하기 위해 군포시 그림책꿈마루에 입사했다.

그림책꿈마루에 근무하면서 많은 공무원과 의원들을 만나면서 업무, 의전 등 평소 갖고 있었던 세상에 대한 철학과 생각에 많은 도전을 받았다. 나름대로 군포시에서 근무하는 이상 그림책꿈마루를 아름답고 건강하게 만들어 많은 사람이 찾는 명소로 만들고 싶었다.

그래서 그녀는 직원으로서 최선을 다했다. 미모가 출중하고 논리 사고가 타고난 그녀는 EBS 뉴스 브릿지 출연, B TV abc 뉴스 인터뷰 2회, KBS 뉴스 인터뷰, SK브로드밴드 함께해요 ESG 촬영, 군포시유투브 노상 군포차 촬영 등 연예인 이상 인기가 높았다. 방송을 본 사람들은 전문가 같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외근하던 중에 놀라운 일을 경험했다. 아이들이 주거 형태로 다투는 모습을 보면서 무언가 잘못되어가고 있다고 생각하게 됐다. 어려서부터 보아온 장애인들에 대한 편견과 그들의 삶에 대한 책임 의식을 느끼게 되었던 그녀는 환경미화원들과 같은 계약직 직원들은 명절 보너스조차 받지 못한다는 현실에서 자신의 무능력을 한탄했다. 또한 군포시와 군포시의회에서의 예산 갈등을 경험한 그녀는 힘없는 시민이라는 것에 최초로 좌절했다고 한다.

그녀의 능력으로는 그 무엇도 할 수 없었다. 같은 직원인데 누구는 보너스 받고 그 누구는 보너스를 받지 못하는 곳이 자신이 근무하는 공간이라는 자체에 자괴감을 느끼게 됐다. 복도에서 환경미화원과 계약직 직원을 보면 그녀가 죄인이 된 느낌과 군포 시민을 위한 사업에 대한 예산권 등등으로 결국 그녀는 정든 회사에서 퇴직하고 자유인이 되었다.

그녀는 자기 능력을 함양하기 위해 화훼장식기사·기능사, 독일 FDF 플로랄스타일리스트 등 자격증을 취득했으며 한국플라워디자인협회(KFDA) 리치플중앙회 회장을 맡아 협회의 발전에 기여하고 있다. 특히 (사)참행복한 이사로 재직하면서 그림책꿈마루 위탁 운영에 관한 자료를 정리, 사업계획을 수립하여 우수한 평가를 받았다.

그녀는 매탄중학교, 송탄중학교, 태광고등학교, 운천고등학교 등에서 학생들의 정서 함양을 위해 재능 기부 및 일일강사로 봉사에 임했으며 수원시 농아인협회에서는 플라워디자인스쿨 강의를 해주었다. 화선꽃예술중앙회 작품전, 제19회 KFDA 작품전, 제20회 KFDA 작품전, 제53회 수원화성문화제 꽃예술전, 제21회 KFDA 작품전, 제54회 수원화성문화제 꽃예술전 등에 자신의 작품을 출품하여 능력을 발휘했다.  뿐만 아니라 2014년 송년데이블 데코레이션 금상, 2015년 송년데이블 데코레이션 입선, KFDA컵 화훼장식경연대회 장려상, 2017년 와인병장식경연대회 금상, 2022년 송년데이블 데코레이션 장려상 등을 수상하여 그 능력을 인정받았다.

이러한 공로로 그녀는 다산 정약용 의정행정대상 사회봉사자 부문 특별공로상 수상, 칼빈대학교 총장 표창장 등을 받았다.

그녀는 부친을 가장 존경한다고 한다. 키도 작고 배움도 부족하면서 장애까지 가진 부친이 자수성가하여 어려운 이웃에게 이타적인 삶을 영위하셨고, 형제간의 우애에서는 모범을 보여주셨다. 더불어 교회 장로로 임명받아 섬김으로 존경받으신 부친을 늘 본받고 싶다고 한다.

그녀는 청소년들에게 자신을 이기는 사람이 되라고 조언해 주었다. 부정적인 사고는 긍정적인 사고로, 작은 것에도 행복과 감사한 마음을 갖는 청소년이 된다면 자신이 원하는 삶을 개척할 수 있다고 자신이 겪은 삶을 재조명해 주었다. 변화하고 싶다면 늘 똑같은 선택을 하지 말고, 어렵고 힘들더라도 다른 선택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경제적 어려움과 장애가 있는 부친 슬하에서 어린 소녀가 당시의 환경을 이겨내고 건강한 시민으로 성장한다는 것은 찬사를 받을만하다. 처녀 가장으로서 아직 결혼하지 않은 그녀는 세상이 아무리 힘들고 갈등이 고조되어도 융합하면 아름다운 공동체가 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다. 이제 자유인이 된 그녀가 꿈꾸고 그리는 세상을 우리는 기대해 본다.

 

약력

경기도 화성시 출생

단국대학교 졸업

단국대학교 석사 졸업

오성종합건설(주) 대표이사 역임

리치플(flower shop) 대표 역임

(사)참행복한 이사 

건설기술자(시공)  

화훼장식 기사

독일 FDF 플로랄스타일리스트

한국플라워디자인협회(KFDA) 리치플중앙회 회장

다산 정약용 특별공로상 수상

칼빈대학교 총장 표창장

 

출처:경기헤럴드 http://www.ggherald.com/default/index_view_page.php?part_idx=94&idx=70116

송용순 기자 / sys5594@hanmail.net  |  입력 : 2025년 02월 15일

- Copyrights ⓒ경기헤럴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